Page 132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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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19일에 거행된 윤현진의 장례식에는 추도객 160여 명이 참석하였고, 수레 3대와 수많은 만장이 나부끼는 가운데 엄
         숙한 분위기 속에 임시정부 국장 國葬 으로 치러졌다. 윤현진의 유해는 상해 정안사로 靜安寺路 에 위치한 만국공묘 (현 쑹칭링능원[宋慶齡陵
         園])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동생의 비보를 전해들은 형 윤현태는 매우 비통해하며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동생의 넋을 기
         리기 위해 1년 뒤 1922년 상해 외인묘지에 안장된 동생의 묘소에 순한글 자필로 ‘윤현진 묻음’이라는 글을 새긴 비를 세웠다. 이
         후 유해마저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였다. 참혹한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윤현진이 사망한 후 고국에 남은 부인 엄정자 여사와 아들 동건은 ‘반일인사의 가족’으로 박해를 받았다. 배급을 아예 주지 않았
         으며 손자 석재의 중학교 입학도 막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익희를 비롯한 양산군민들은 윤현진의 항일독립정신을  널리 기

         리기 위해 1959년 4월 15일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 내에 윤현진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건립 후 2개월 뒤 진행된 기념
         비 제막식에는 지영진을 비롯한 구하스님, 최학선 등 윤현진과 뜻을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추념사를 낭독하며 선생의
         뜻을 되새겼다.
         정부는 윤현진의 독립정신의 뜻을 기리고자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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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현진 건국공로훈장증과 훈장
              1962.3.1.   |  51.0×38.0, 지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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