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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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11일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 당선을 공포하고 재무차장으로 윤현진이 선임되었다. 윤현진의 초기 임시정
         부 재무차장 역임은 그만큼 윤현진의 자금동원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1921년 2월까지 사실상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
         임짐과 동시에 의용단을 비롯해 여러 조직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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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100원짜리 독립공채
          1919   |  독립기념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활동하던 윤현진은 1921년 9월 17일 오후 2시 상해 바오창루 寶昌路  바오캉리 寶康里  54에 위치
         한 프랑스 조계 천주교병원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현진은 병석에 누워 죽음을 앞두고서도 우리 민족의 대단
         합, 대단결의 결여를 가장 애석해하며 국민대표회의에 모든 역량을 결집시킬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을 정도로 상해 임시정부의
         개편을 통한 항일운동 역량의 총결집을 염원하였다. 이와 더불어 “독립하지 못하면 나의 뼈 我骨 를 고향 故山 에 묻지 말며 내 자녀 我
         子女 를 출가 嫁 치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창호는 윤현진이 입원했을 때 소지품까지 저당 잡히면서 입원비를 대었고 장례비까지

         전담하며 몹시 애통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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