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3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P. 103
양산농민조합 시위운동
1929년을 기점으로 항일운동가들 내부에서 운동의 중심축을 신간회에서 노동
운동과 농민운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
대공황으로 민중의 삶이 어려워진 상황과 맞물려 더욱 힘을 받게 되었고, 그 결
과 1931년 각 사회단체에 대한 해소론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항일운동의 역량은
빠른 속도로 혁명적 농민·노동조합운동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은 항일운동의 이러한 노선전환 속에서 1920년대 청년운동, 신간
회운동, 소년운동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1931년 4월 창립되었
다. 이후 조합은 지주의 소작권 이동과 고율소작료 징수를 반대하며 농민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고, 그 과정에서 1932년 제3차 정기대회를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운동방침으로 ‘소작권 확립, 1일 임금 체계, 소작료 4할’ 등을 정했다.
이에 양산경찰서는 양산농민조합 집행위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검거하
였고, 경찰의 탄압으로 조합 활동이 불투명해지자 조합원 300여 명은 구금된 간
부들을 석방하기 위해 1932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시위 군중들은 정문과 뒷문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지며 구금된 간부 16명
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관이 쏜 실탄에 맞아 북부동 181번지 거주 농민 출신 윤복이
가 사망했으며, 유공자들이 받은 형량은 다음과 같다.
ࢿݺ ഋ ো۸ স ࣗ
김장호 2년 18 무직 북부동
김외득 1년 6월 21 무직 동면 석산리 736
최달수 10월 17 농업 남부동
정진영 10월 25 농업 남부동
김태근 10월 18 농업 남부동
한동선 벌금 50원 18 무직 북부동
0
1
10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