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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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호(金章浩, 1915 ~ 1939)
동면 법기리 897번지에서 태어났다. 1922년 양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8년
제15회로 졸업하였다. 양산농민조합 시위운동으로 체포된 한동선과 동기생이
다. 1929년 경성전기학교 (옛 서울수도전기공고) 에 입학하였다가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관련되어 귀향하였다.
1931년 양산농민조합이 창립된 이후부터 줄곧 소년부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전병건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한 양산농민조합은 소작권 영구 확
립, 지세공과금의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을 재차 결의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
은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3월 14일에 상북면에서 조직 확대 연설을 하고 있
던 조직부장 이봉재를 검거하고, 16일에는 간부 김용호, 신영업, 이기주 등을 양
산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하였다.
김장호는 전병건, 김외득 등 조합원들과 양산경찰서에 진입하여 구속한 간부
들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진행하였고, 그후 최달수, 이영근 등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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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부 요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장호
1932년 10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뤘다. 개성 소년
형무소에서 6개월을 보내고, 1934년 6월 11일 김천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36년 6월 이필란과 결혼하여 슬하에 외아들을 두었다. 1937년 부친의 한의
학을 배워 한의사가 되었으나, 1939년 10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북부동 542-3
번지에서 타계하였다. 김장호의 친형인 김용호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
사위원회의 증인신문에서 동생 김장호가 양산경찰서 위생과에 근무했던 장자
관에 의해 무수한 고문을 당한 사실을 증언했다. 2004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김외득과 관련된 내용은 상설전시 ‘4. 양산농민조합 시위운동과 통도사의 항일독립운
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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