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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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호(姜在鎬, 1901 ~ 1986)
양산면 호계리 72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3년 양산공립보통학교 (현 양산초등학교) 에
입학하여 1918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양산읍 만세운동 당시, 엄주태, 전병건, 정주봉 등과 함께 군중
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유
죄 판결을 받았으며,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을 확정받고 대구형무소에
서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동경대지진으로 귀
국하였다. 이후 양산청년회관 건립에 협력하였고, 동아일보 양산지국장과 잡지
‘개벽’의 지사장 등을 지냈다.
1928년 신간회 양산지회 결성 당시 서기로 선출되면서 양산의 사회운동에 두각
을 나타냈다. 신간회 양산지회에서 1930년 여름 문맹퇴치 목적으로 문자보급반 066
강재호
을 파견했을 때, 류동렬과 함께 물금 지역에 파견되었다. 1975년 12월 부산에서
설립된 사단법인 3.1동지회의 사무국장을 지냈다. 부인 이소수 (李小守) 와 청빈한 노
후를 보내다가 1986년 3월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827번지에서 타계하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류경문(柳敬文, 1900 ~ 1950)
본명은 말문 末文 이며, 별명은 경문, 계문 桂文 이었다. 4월 1일 양산읍 2차 만세운동
을 이상환과 함께 주도하였다. 징역 6월을 선고받고 1919년 11월 20일 대구형무
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공훈전자
사료관 공적조서에 1950년에 타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에 대통령표
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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