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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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활동


         서병희 (徐炳熙, 1867~1909)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 (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 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영호 榮浩 , 자 字 는 경운 敬運 으로, 경원 敬元 이라고도 하였다. 좌
         삼리는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1887년부터 1891년까지 서울에서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1902년부터 양산에서 한의업에 종사
         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자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궐기하였는데, 군대해산이 이루어진 다음인 1907년 11월, 임진·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해산군
         인 51명과 함께 영남으로 내려와 윤정의 부대와 제휴하여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5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양산군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을 벌였다. 1908년 8월에는 산청군 두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 2월부터 의병장이 되어 경상
         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함안군 군북면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하였으며, 6월
         20일에는 칠원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어 8월에는 부대원 5명을 거느리고
         창원군 양전면 호라리에 사는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으며, 9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재무주사 1명을 처
         단하고 11월에는 의령·고성 등지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고 일본인 상인을 사살하는 등 경남 일대를 전전하며 활발한 활동
         을 벌였다.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본 경찰 2명에게 붙잡혀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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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병희 생가터와 기념비



         ※ 일제 경찰의 평가
         “수비대, 헌병, 경찰의 엄중한 수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 3개년에 걸쳐서 의병으로 활동한 까닭을 탐구하건대 위태하면 무기는 흙 속에 매몰하고 부하는 해
         산하여 양민을 가장하고 혹은 변장하여 시장에서 행상(行商)을 하는 등 엄격한 눈을 피하는 수단이 교묘한데 기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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