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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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구(曺秉球, 1907 ~ 2003)
         하북면 지산리 583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 임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4월 통도중
         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불교학과 한문 등의 과목을 담당하면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근본

         적인 부당성과 민족사상을 강조하고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다고 가르쳤다.
         고종황제의 장례식 때 상해 임시정부의 김규식이 지었다는 ‘황제의 나라 잃은 슬픔’을 읊
         은 「독립기원의 시」와 김창숙이 지은 「고종황제만장시」를 당시 울산 백양사에서 수양하고
         있던 김창숙으로부터 배워 동료 교사 김말복에게 전해주었다.
         이 일로 1941년 9월 양산경찰서에 검거되어 1942년 5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12월 인터뷰에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할 적엔 정말
         죽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일제를 무너뜨릴 때까지 살아야한다는 일념으로 고난을 이겨
         냈다’고 당시의 힘든 상황을 회고하였다.
         출옥 후 통도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며 일본 역사교과서의 허구성 등을 들추며 항일운동

         을 계속하다 해방을 맞았다. 1946년 9월부터 1949년 8월까지 보광중학교 교사로 재임하                          069
         고 퇴직하였다. 부산시 영도구의 입정상업학교를 인수하여 해동중학교를 설립하는데 동                                조병구
         참하고, 이후 해동중, 고등학교 재단 원효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
         았다. 해방 후 경남불교종무원 원장으로 재임하며 수도승 훈육과 불교계 사무에도 힘을
         기울였다.
         1979년 12월 부산시 동구 초량동으로 전적하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
         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2003년 6월 21일 부산보훈병원에서 91세로 타계하여 대전국립

         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묘역: 독립유공자2-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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