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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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태(嚴柱泰, 1900 ~ 1928)
         중부동 250번지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양산공립보통학교 (현 양산초등학교)  2학년
         에 편입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엄씨 집안은 양산에서 ‘엄부잣집’으로 통하

         였고, 지 池 씨, 전 全 씨 집안과 함께 3.1운동부터 1920년대까지 줄곧 양산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으며,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도 적게 매겨 평판이 좋았다.
         엄주태는 기장 3.1운동을 주도하고 지역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의 부호 박인표의 딸 박분행과 결혼하였다. 장인 박인표는 1919
         년 동경에서 2.8독립운동을 주도한 김철수 金喆壽 의 매형이다. 1920년대 양산청
         년회와 신간회 양산지회에서 활동한 엄주화 嚴柱和 가 친형이다.
         출옥 후 양산청년회에서 주로 체육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25년 4월에
         개최된 양산청년회 제14회 정기총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시기에
         개최된 조선기자대회에 전병건과 함께 동아일보 기자 신분으로 참가하였다.

         1927년 상북면 석계리로 분가해 살았으나, 고문과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1928
                                                                             063
         년 11월 28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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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건(全秉健, 1899 ~ 1950)
         중부동 177번지에서 태어났다. 별칭은 전혁 全赫 이다. 아버지 전기준은 1920년 2
         월 양산면장을 역임하였다. 전병건은 1912년 양산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
         하여 1914년에 졸업하였다.

         부인은 배기영 裵基英 으로 1923년 5월에 결혼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배기영은
         1922년 8월에 양산 최초의 여성단체로 결성된 양산부인회의 초대 총무를 맡
         았고, 1929년 6월에 창립된 근우회 양산지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한
         여성운동가이다.
         전병건은 출옥 후 1922년 10월 양산청년회 정기총회에서 문예부장으로 선출되
         었고, 각종 강연회에서 강사로 활약하였다. 1923년 4월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
         서 양산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양산청년회가 해체되고 전병건의 주도로 양산청년동맹이 결성되었는
         데, 이 문제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8년 양산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
         로 선출되었다.                                                            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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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에는 동아일보 양산지국장을 역임하면서 양산농민조합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3월 16일 조합간부 7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양산경찰서 시위 운동
         을 전개하였다가 3월 24일 체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남 동부적색농민조합
         조직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1936년 3월 25일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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