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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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에 석방된 김철수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유학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후 부산상사라는 무역상을 시작
         하였으며, 동래은행의 주주로 활동하고, 1920년 7월 양산청년회가 결성될 때 초대 회장을 맡아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김철수는 2.8독립선언의 주동자로서 전국적 신망과 명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 이후 지도급 인물로서
         많은 전국순회 강연을 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경영하던 부산상사의 자금과 고향의 많은 전답
         을 사회활동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1928년부터는 양산지역 농촌계몽운동과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5년간 양산유치
         원의 원장으로 유치원을 경영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 실시와 함께 양산경찰서 순사부장 기타야마가 끊임없이 김철수를 회유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일제는 김철수의 가족에게서 모든 공민권을 박탈하고 여행은 물론 잡곡배급 조차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제 말기
         는 몹시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해방 후, 김철수는 양산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장을 맡았으며, 1946년 2월에는 부산에서 자유민보를 창립하고 사장으로 취임
         하였다. 1946년 말, 미군정에서 중도좌파를 중심으로 90명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선발할 때 입법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7
         년 1월 경남도지사로 취임하여 1년 9개월간 근무하였다.
         1949년에는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을 역임하였고, 6.25전쟁이 터지자 전쟁구호민을 위한 봉사활동에 전력을 쏟
         았다.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철수는 10여 년 동안 노인증흥회를 이끌었고, 사단법인 3.1동지회 이사장을 맡아 부산과 경남
         지역 3.1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모으고 책자를 발간하는데 힘썼다. 1977년 삶을 마감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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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수 필 추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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