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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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金喆壽, 1896 ~ 1977)
상북면 상삼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포 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부
산상업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에 진학하였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교장으로부터 구포
은행에 취직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1913년 7월 일본 도쿄의 게
이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철수는 4살 위인 윤현진과 함께 1916년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면서 결성된 신아동맹
당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2월까지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총무를 맡았으며, 1918년 백남훈, 김도연, 전영택 등과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학회에서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1918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대통령 윌슨이 세계평화 14개조를 제시하자, 조선학회의 구성원들은 독립선언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1918년 9월 유학생 100여 명을 규합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이 조직되었고, 12월에는 김 090
철수를 포함한 11명의 인물들이 유학생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들은 일 김철수
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거사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1919년 1월 중순에 독
립선언 계획을 완성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하고 일본어와 영어로 된 번
역문은 각국 원수와 외국공간에 발송하기로 하며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정했다. 그
리고 자신들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 송계백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경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유학생
들은 먼저 동경에서 독립선언을 거행하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거쳐 1919년 2월 8
일 YMCA 1층 강당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
다. 백관수의 2.8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김도연이 4개항의 결의문을 낭독하는 순으
로 진행되었고, 이후 시가행진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경찰들이 현장에 들이닥쳤다. 실
행위원 10명을 비롯하여 5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주동자 10명은 모두 내란죄
와 출판위반혐의가 적용되어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변호인단의 반론과 여론에 못
이긴 일제가 일주일 후 출판법위반죄를 적용, 2.8독립선언 대표 9명 중 김철수를 포함
한 6명은 금고 9개월, 3명은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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