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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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우(梁萬佑, 1897 ~ 1968)
1897년 7월 상서면 범어리 (현 물금읍 범어리) 에서 태어났다. 1911년 6월 출가해 통도사에
입산하였다. 1954년 3월 법원의 허가를 받아 호적명을 무홍에서 대응으로 정식 개명
하였다.
3.1운동 당시 통도사 지방학림과 불교전문학원의 동기였던 오택언으로부터 독립선언
문을 전달받고 13일 양산 하북면 신평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3일 밤 통
도사 주지 김구하로부터 도피 자금 100원을 받아 이기주와 함께 피신하였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이기주와 헤어지고, 1920년 6월 초에 서울 각황사에 도착하였다.
각황사 (현 조계사) 에서 조선불교청년회 결성에 참가하고 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불
교 중앙학림에 정식 편입하여 수학하였다. 당시 조선불교청년회는 불교유신운동을 효
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조선불교유신회를 1921년 12월 21일에 창립하였는데, 이때
불교유신운동을 반대하는 친일 승려 용주사 주지 강대련을 사찰에서 축출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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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명고축출사건으로 불교유신회 회원이었던 양만우와 김상호,
양만우
강신창 등이 1922년 3월 26일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강
대련을 끌고 다니며 종로거리를 행진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의 주선으로 보성중학교에서 교법사 및 종사원으로 근무
하였다. 1928년 2월경에 통도사로 귀환하였고, 창녕, 울산, 마산, 진주 포교당 등에서
포교사로 활동하였다.
1938년 9월경 진주경찰서에 만당사건 (만당:한용운의 지도하에 김상호, 김법린 등이 1930년 5월에 조직
한 항일 비밀결사조직) 으로 연행되었는데,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조직을 누설하지 않았고 결
국 기소되지 않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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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스님 증명사진 만우스님 표창장
현대 | 4.5×3.4 2010 | 14.0×11.0 | 김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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