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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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을 모집하다
1919년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론, 외교독립론, 교전단체론 등의 형태로 분화되었다. 이렇게 세분화
된 운동방략은 실질적인 항일투쟁에서 통합되지 못한 채 개별적인 독립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 가운데 조직을 이끌
고 무장투쟁을 원활하게 전개하는데 필수적인 요인은 자금이었다. 즉 재정확보는 독립군의 존재 자체를 가능케 하였던 중
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재정확보의 어려움은 당시 설립된 독립운동단체의 공통적 현상이었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은 일
제의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었으므로 항상 위험부담이 있었다.
김상헌(金祥憲, 1893 ~ 1945)
1893년 2월 1일 동면 금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불교에 귀의하여 동래 범어사에 들어
가 범어사에서 명정학교를 마치고 서울 불교중앙학림 (동국대 전신) 에 진학하였다. 그는 만
해 한용운이 지도하던 유심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김법
린, 정병헌과 함께 유심회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
1919년 2월 말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 계획을 전달받고 탑골 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 김법린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로 내려왔다. 범어사 승려
들과 불교전문강원, 지방학림, 명정학교의 학인들을 규합하여 범어사가 중심이 되어 3
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상헌은 동래 3.1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3월 6일 범어사에서 독립선언식을 비밀리에
거행하고 김법린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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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 위해 김상호, 신상완, 백성욱, 김봉신 등과 함께 ‘혁신공보 革新公報 ’ 발행에 참여하였 김상헌
다. 지방으로 다니면서 국내 정보의 수집과 국외 소식의 전달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국내 불교계의 명망 높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받고 김상호와 상의하여 1919년 8월 중순경 김
포광 스님을 데리고 상해로 갔다가 신상완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의용승군 조직 등 밀명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상헌은 신상완, 김법린과 함께 범어사, 석왕사 등지에 거점인 기밀부를 설치하
기도 하였다.
그 후 신상완의 소개로 1919년 8월 강원도 철원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여 함경남도, 강원도 등지
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국내 여러 사찰에서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1920년 2월경 김태흡 金太洽 으로부터 915원을 모
금하여 조선지도를 사서 독립운동계획 수립에 활용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에 자금과 함께 보냈다.
김상헌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국내 유력한 승려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상해로 보내려는 계획을 추진하다 1920년 4월 6
일 신상완, 김태흡, 이석윤 등과 함께 서울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 후 이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43명이 검거된 철원애국단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하여 고초를 겪고 1920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승적이 있던 동래의 범어사로 돌아와 젊은 승려의 훈육에 힘쓰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불교계
의 여러 업무로 자주 서울을 다녔는데 열차 승강대에서 아이를 업은 추락 직전의 부인을 구하고 자신은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끝내 완치를 보지 못하고 그해 12월 15일 생을 마감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배달옹 裵達翁 , 김달 金達 등의 이름을 이명 異名 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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