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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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득(金外得, 1912~1993)
동면 석산리 736번지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
월 만세시위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으로 구류 15일을 선고 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귀향하였다. 그 후, 1920년대 청년운동,
신간회운동, 소년운동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조합은 지주의
소작권 이동과 높은 소작료 징수를 반대하며 농민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고, 그 과정에서 1932년 제3차 정기대회를 통해 조직을
확대하고 운동방침으로 ‘소작권 확립, 1일 임금 체계, 소작료 4할’ 등을 정했다.
이에 양산경찰서는 조합의 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양산농민조합 집행위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검거하였다. 경찰의
탄압으로 조합 활동이 불투명해지자 조합원 300여 명은 구금된 간부들을 석방하기 위해 1932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로 몰려갔
다. 경찰서에 도착한 시위 군중들은 정문과 뒷문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지며 구금된 간부 16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때 김외득은 구금된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군중을 지휘한 죄명으로 수배되어 김해, 부산 등지로 피신하다가 4월 2일
밤 물금역에서 검거되었다. 이후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요죄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8월 김장숙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93년 8월 부산 금정구 부곡4동 710번지 자택에서 타계하여 양산 동
면 법기리 산 66번지에 안장되었다. 1983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042
김외득 건국훈장 액자
1993 | 81.0×61.0
043
국가유공자 장례태극기
현대 | 2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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