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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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경찰서 시위운동
1932년 2월부터 양산농민조합의 활동이 강화되자 더 이상 농민조합의 활동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양산경찰서는 당시
농민조합 조직선전부장인 이봉재를 비롯하여 16명을 검거하고 구류 및 벌금 처분하였다.
양산경찰서의 농민조합원들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농민조합의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이에 양산농민조
합 집행위원장이었던 전병건은 김장호와 함께 수감된 인물들을 탈환하기 위해 상서면 최해서와 최학윤의 방에서 계획을
세웠다. 김외득은 양산읍내를 담당하고 한동선, 함성관 등은 각 마을별로 농민들을 모으게 하였다. 그 결과 농민조합원과
구류처분을 받은 가족들 약 300명은 3월 16일 오후 9시30분에 양산경찰서로 몰려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시위 군중들은
정문과 뒷문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지면서 경찰서에 진입하면서 구금된 간부 16명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관이 쏜 실탄에 맞아 북부동 181번지 거주 농민 출신 윤복이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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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1932.3.18. 양산경찰서 시위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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