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P. 18
양산의 의병전쟁과 서병희(徐丙熙, 1867~1909)
서병희는 상북면 좌삼리 左森里 출생으로 1881년 (고종 18) 까지 한학 漢學 을 수학하고,
1887년에 상경하여 한의학을 배워 양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였다. 1905년 을사
늑약으로 국운이 기우는 모습에 한탄했던 서병희는 1907년 (순종 즉위년) 10월 의병
장 허위 許蔿 의 휘하에 들어갔다. 1908년 1월, 13도 연합군의 서울 탈환 작전에 허
위의 결사대 300명의 선봉장으로 참여했으나 실패한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영
남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다. 부대원 51명과 함께 경주 산내면의 윤정의와
연합하여 병력 68명, 화승총 58정, 양총 2정, 군도 1진으로 부대를 재편하였다.
1908년 5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에는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양산군 하
서면 下西面 ·하북면 下北面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08
년 9월에는 경상남도 산청으로 이동해 의병장 박동의 휘하에 들어가 이학로와
함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다. 1909년 3월, 이학로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추고, 함안, 창원, 진주 등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
동하다가 1909년 10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
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았으며, 4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국권 상실을 끝
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 (좌삼리 97번지) 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
는 멸실되고 공터만이 남아 있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