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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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尹顯振, 1892~1921)
1892년 9월 16일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산 右山 이다. 1908년 구명학
교 (龜明學校, 현 구포초등학교) 를 졸업한 후, 서울의 배재학당에 진학하여, 고등교과를 이
수하였다.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1915년 10월부터 1916년
2월까지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신아동맹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의 인맥을 확대해 나갔다.
1916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2년여간 국내에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 활동 등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으면서 숙부 윤상
은과 백산 안희제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용이하게 유통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19년 3.1운동을 경험하고 상해로 떠난 윤현진은 여러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 조직 당시, 재무를 담당하는
탁지경에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7개 위원회 중 신익희 외 8명과 함께 내무위원으
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11일 통합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었는데,
그만큼 상해 임시정부에서 윤현진의 자금동원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윤현진은 1921년 9월 17일 오후 2시, 멀리 상
해에서 ‘디브스 (장티푸스) ’로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누워 죽음을 앞두고서도 우리 민
족의 대단합, 대단결의 결여를 가장 애석해하며 국민대표회의에 모든 역량을 결집
시킬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장례는 9월 19일 추도객 160여 명이 참석하여 수
레 3대와 수많은 만장이 나부끼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상해 임시정부
국장 國葬 으로 치러졌다. 동생의 비보를 전해들은 형 윤현태는 타국에서 죽음을 맞
이한 동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22년 상해 외인묘지에 안장된 동생의 묘소에 순
한글 자필로 ‘윤현진 묻음’이라는 글을 새긴 비를 세웠다.
양산군민들은 윤현진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9년 4월 15일 춘추공원
내에 윤현진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2개월 뒤 진행된 기념비 제막식
에는 구하스님, 최학선 등 윤현진과 뜻을 함께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추념사
를 낭독하며 선생의 뜻을 되새겼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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