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양산시립독립기념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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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일가의 독립운동
                  윤현진 일가의 본관은 파평 坡平 이다. 할아버지는 동래 출신 만석꾼으로 사천군수를 역임한 윤홍석 (尹洪錫, 1843~1902) 이다. 윤홍석은
                  개항 이래 부산과 구포를 왕래하며 새로운 문물을 빈번하게 접할 수 있었다. 윤홍석에게는 윤현진의 부친 윤필은 尹弼殷 을 비롯해

                  그 아래로 윤명은 (尹命殷, 고성과 울산군수 역임) , 윤상은 (尹相殷, 1887~1984, 구포은행과 구명학교 설립) , 윤영은 (尹永殷, 구포은행 주주, 사립구명학교 교장, 구포공
                  립보통학교 학무위원)  등 네 아들이 있었다. 윤현진의 부친 윤필은은 1886년 12월 3일, 25세의 나이로 문과 병과 文科 丙科 에 급제하면서
                  생활 터전을 구포에서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 당시 이름 수두리(蘇塗里) 로 옮겼다.
                  삼촌들도 실업과 교육·결사 등을 통하여 민족역량 배양에 앞장섰다. 윤명은은 경상도관찰부 주사로 임명된 이래 고성군수와 울
                  산군수를 지냈으며, 윤영은과 함께 1908년 대한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근대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구포은행과 구명
                  학교를 설립한 윤상은, 구명학교 교장과 구포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낸 윤영은 등은 윤현진이 평소에도 존경한 숙부들이
                  다. 부친 윤필은은 소토리로 옮긴지 3년 만인 1889년 큰 아들 윤현태 (尹顯泰, 1889~1964) , 이후 둘째 아들 윤현진과 딸 윤덕경 (尹德卿,
                  1895~1933) 을 각각 낳았다. 특히 형님 윤현태는 우산 윤현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인물이다.
                  윤현태는 1912년 8월 양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맡았으며, 양산에서 대금업을 하면서 1916년 12월 이래 부산에서 백산 안희

                  제가 경영한 백산상회와 백산무역주식회사, 경남인쇄주식회사 등의 주주 및 중역으로 활동했다. 윤현태는 1919년 일금 一金 상회
                  를 전석준과 함께 설립하고, 양산 북부동에 의춘상행을 설립하였으며, 안희제를 통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자금을 독립운동 자
                  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결국 윤현진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
                  던 것은 자신의 직접적인 인맥을 통해 조달한 것도 있었지만 형 윤현태로부터 지원받은 것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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